수학 레벨 테스트의 함정
학습 태도가 좋은 아이가 있습니다. 선행을 하지 않은 아이라 윗 학년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전혀 모르지요. 선행을 하지 않는 대신 이 아이는 독서력이 풍부하고, 자료를 찾으며 공부하는 아이입니다. 단어 하나를 찾아도 반대어, 유의어, 예문 등을 찾아 개념 전체를 확대하여 공부합니다. 교과서를 열 번 이상 들여다 보고 툭치며 툭나올 정도로 수학 개념을 말할 수 있습니다. 반복 연산 문제를 풀고, 유형별 문제를 풀기 보다 수학 한 두 문제를 갖고 끙끙거리며 자기 힘으로 풀어 냅니다.
그래도 불안한 이 아이의 어머니는 손을 꼭 잡고 테스트를 받으러 갑니다. 학교에서는 나름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학원에서는 말도 안되는 점수가 나오게 되겠지요. 아이가 어떤 문제를 틀렸는지 받아 보려고 했지만 문제 유출이 되기 때문에 보여 줄 수 없다고 합니다. 한숨 쉬며 돌아 오는 길, 아이는 전혀 배우지 않은 문제들이 있어 풀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심화도 아니고 전혀 배우지 않은 개념 자체가 문항에 있었다는 겁니다. 초등 5학년에게 초등 5학년의 수학 개념을 묻는다면 문제가 안되겠지만, 초등 5학년에게 고1 수학 문제를 풀게 했습니다. 정상적인 시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또 시험 문제를 내는 기준이 무엇에 근거한지 궁금합니다. 시중 문제집일까요, 기존 수능 기출 문제일까요, 강사들이 만들어 낸 문제일까요? 체인점 사장이 지역별로 요약하여 준 내용일까요? 대부분 덜컥 겁이 나니 모든 것을 스톱하고 빨리 선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아이도 있습니다. 그 어려운 시험인데 모든 문제를 다 풀어 70점 정도의 점수를 받습니다. 초5학년이 고1 문제를 풀어 70점 이상이 나왔다면 굉장히 잘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서부터 전자의 아이는 풀이 죽고 자신은 수학을 못하는 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때 믿을만한 사람이 다시 제대로 말해 주는 겁니다.
“초등 5학년이 고1 문제를 틀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야. 네가 고1이 되어 그 과정을 배워 시험 친다면 결과는 달라져. 그러니 네 학년 것을 충실히, 깊이 있게 공부하도록 해”
아이가 또 다시 풀이 죽어 말합니다.
“미리 배워 70점 맞던 아이들은 그 때 가면 더 잘하게 될 텐데요...”
“절대 아니야. 신기하게도 그 아이들은 그 때도 그대로 70점이 나올 거란다. 먼저 배운 것에 의해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라 좋은 태도로 어떻게 공부했느냐가 결과를 좌우하게 돼. 희망적인 것은 고2 이후에 더 나갈 진도가 없다는 거란다. 만일, 계속해서 선행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면 후자의 아이가 유리하겠지만 결국 진도는 고2 때 다 나가게 될 것이고 고 3이 되면 동일한 상황이 돼. 남들 선행할 때 네 학년 것을 탄탄히 하고 가면 앞으로 돌아가 반복할 시간이 줄어들게 돼. 또한 수학은 여러번 반복하여 외우는 학문이 아니야. 몇 번 돌린다느니, 몇 바퀴 돈다느니 모두가 그런 말을 해도 넌, 돌릴 생각 말고 끙끙대며 생각하는 수학을 풀어라. 수학적 사고가 성장할 때 수학 문제를 잘 풀게 되는 것이지 수학 문제를 잘 풀어서 수학적 사고가 성장하게 되는 것이 아니란다. 적당히 알아서 풀 수 있는 수학은 없어. 적당히 알아서 진도 레벨만 높이는 수학하다가는 고 2-2학기 부터는 폭망하게 된단다. 알면 확실히 아는 것이고 조금이라도 모르면 완전히 모르는 것이 수학이야. 절대 절대 절대 암기 과목처럼 반복하고 유형별 문제를 풀어 본다고 되는 것이 아니야. 지금 나오는 점수는 절대 신경 쓰지 마.”
초등 때 높은 점수를 받고 몇 학년 과정을 했다고 난리 치던 아이들이 고등학교 2-2학기 즘 되어 제 학년이 되어 보면 똑같은 수포자가 되어 있습니다. 선행빨로 2-1까지는 외워서라도 어떻게 버텼는데 2-2부터는 도저히 능력 밖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여기서 엉터리 자가 진단을 시작합니다.
“선행을 더 할 걸...선행을 많이 안해 놔서 그래...몇 바퀴 더 돌릴걸...”
우리가 절대 피해야 할 동네 언니들이 있습니다. 아이 교육에 실패한 이유를 자가 진단으로 결론 내리고 남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경우입니다.
“넌 내꼴 나지 말고 이것 저것 시켜. 내가 이렇게 안해서 망한거야. 거기가 좋고, 이게 좋다더라.”
또 다른 부류의 옆집 언니들도 있습니다. 중학교까지 공부 잘한다고 소문나서 그 언니가 몰아준 학원으로 우르르 몰려 갔는데 고등 이후 사라져 연락 안되는 언니들입니다.
그 옆집 언니들이 빠진 구렁텅이 나도 똑같이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학교 실력으로는 제대로 된 실력을 알 수 없으니 모의고사를 풀려 보라는 말씀도 많이 합니다. 이 말에 얼마나 큰 함정이 있을 수 있는지 살펴 볼게요. 17년 수능이 끝나면 한달 안에 모든 문제집은 이전의 수능 기출 문제 위주로 편찬이 됩니다. 즉, 알게 모르게 학원 다닌 아이들은 이전의 기출 문제를 한번씩 죄다 풀어 보는 상황이 생깁니다. 즉, 개념을 적용하여 ‘이 문제를 어떻게 풀까?’를 생각하게 되는게 아니라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었지?’ 라며 기억을 더듬게 됩니다. 새로 풀어 보는 것 같지만 이미 몇 번 풀어 본 문제입니다. 수능 문제를 미리 풀어 보며 실력을 체크한다는 말에는 이런 함정도 담겨 있습니다. (실력 향상을 위해 이후에 기출 문제를 풀어 보는 것은 중요하지만, 당시 실력 체크를 위해 못 풀어 낸 것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혼자 수학을 공부한 친구가 있다면 이 부분에서 전혀 좌절할 필요가 없어요.)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선행을 잘 풀었다고 좋아할 일도, 못 풀어서 실력이 없다고 할 일도 아니란 뜻입니다.
그저 묵묵히 제 학년 것, 제학년 심화(어려운 문제집을 푸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한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이 심화입니다.)를 깊이 있게 꾸준히 하는 것이 최고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문제 풀이는 개념을 잘 습득했는지 알아보는 척도이지 문제 푼 것을 고친다고 해서 개념이 습득되는 게 아닙니다. 문제를 많이 풀어서 실력이 올랐다 하는 경우도, 틀린 문제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놓친 개념이 무엇인지를 파악했을 때만 가능합니다. 즉 틀린 문제를 통해 다시 개념으로 돌아가 명확히 공부하고 돌아 온 경우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개념입니다. 수학적 정의를 자기 언어로 소화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어려운 문제가 나왔을 때 답지 보고 바로 수정하지 말고 끙끙거리며 애를 써봐야 합니다. 이렇게 애를 쓸 때만이 수학적 사고가 성장합니다. 개념과 개념을 연결시키는 유연한 사고도 필요한데, 또 다시 독서 습관이 큰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습니다. 언어의 꽃이 수학과 연결됩니다. (비트게슈타인 - 수학의 기초에 관한 강의 ▪ 올출판)에 잘 설명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수학은 거짓말을 못합니다. 카이스트 대학원생이 와서 가르쳐도 서울대 수학과 교수가 와서 가르쳐도 오직 그 수학을 배우는 아이만이 깨닫고 알아서 손뼉을 쳐야 해결이 됩니다. 그래서 가장 솔직하고 정직한 학문입니다.
백날 비싼 돈 들여 설명해 주고 설명만 받았던 수학, 먼저 배웠다고 좋아했던 수학, 몇 바퀴 돌렸다고 좋아한 수학, 돈 값 못하고 시간값 못합니다. 설명만 들어 왔던 아이는 개념을 설명 할 수 있는 아이를 따라 갈 수 없습니다. 이는 곧 4점짜리 문제엔 손을 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신으로 치자면, 쉬운 중간고사에서는 평균 이상, 어려운 기말에서는 평균 이하의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점수를 말합니다-다시 말해 합산하여 딱, 평균 수준까지만 가능하다는 말이지요. 9 to 9 수학에, 현행 선행 학원, 심화 수업 과외까지...
비용대비 평균이면...우리 아인 도대체 어떤 수학을 공부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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