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공부비법

작성자 : Polycle, http://medwon.egloos.com/

 본과 1학년 재학시절 용돈벌이를 위해 과외를 했던 한 학생의 사연을 소개할까 한다. 공부는 죽기보다 더 싫어했지만 그림 그리는 일은 무척이나 사랑했던 세미는 부모님에 의해서 소 잡듯이 이끌려 내게 맡겨진 학생이었다. 세미는 당시 고등학교 2학년으로 학원을 3군데나 다니고 있었으며 학교 성적은 반에서 중간등수 정도였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아이가 과학 공부에 어려움이 많다며 세미 어머니는 내게 생물과 화학 과외를 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렇게 그 녀석과 나의 짧은 인연은 시작되었다. 출발은 아름답지 못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삼일이 지나도 세미의 건방진 태도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명을 해줘도, 문제를 풀라고 해도 세미는 연습장에 그림만 그렸고 나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공부하라 타일렀지만 내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비 오던 어느 날, 정확치는 않지만 해부학 시험 전날인 것으로 기억한다. 비는 쏟아지는데 택시가 잡히질 않아서 과외시간을 놓칠까봐 방과 후 곧바로 세미네로 향했다. 그날도 여전히 세미는 듣는 둥 마는 둥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나 역시 그러려니 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헌데 잠깐 쉬는 타임에 어깨 너머로 세미가 그리던 그림을 우연히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날따라 그 그림에 유난히 눈길이 갔다. 의학 만화의 일부를 그리고 있었는데, 그림 속에는 뇌가 어설프게나마 묘사되어 있었다.

 나는 세미에게 이 만화 재밌니?라고 물었고, 자신의 그림에 처음으로 흥미를 보인 내게 놀랐는지 무슨 상관 이예요. 남 이사 라는 냉소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이내 나는 책가방에 들어있던 내 신경해부학 노트의 brain 파트 필사본을 세미에게 보여주며, 나도 거기(뇌) 그림은 자신 있는데 라고 썩소를 지으며 맞받아쳤다. 그 녀석은 관심이 생겼는지 노트를 빼앗아 여기저기를 뒤적이며 노트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자신은 만화가가 꿈인데 어머니가 반대한다는 이야기, 공부가 재미없다는 이야기, 너처럼 그림 그릴 수 있는 공부면 잘해낼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 등을 주렁주렁 늘어놓았다.

 집으로 돌아와 어떻게 하면 세미가 공부를 재밌게 할 수 있을까 한참동안 생각했다. 삼십분 정도 지났을까, 서랍 속의 생물 노트를 이리저리 넘기다 고교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리며 세미를 위한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다음날 세미에게 고교시절 생물 노트를 보여주며, 그리고 꾸미기를 좋아하니 노트정리를 알록달록 해보면 어떨까?라는 제안을 했고, 처음엔 시큰둥하던 세미도 이네 관심을 갖더니 노트를 며칠만 빌려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났고, 바쁜 본과 생활 속에서 도저히 과외까지 감당할 수 없어서 세미 어머님께 과외를 그만둬야겠다고 말씀드렸다. 두 달의 짧은 인연을 뒤로한 채 세미와 나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3년이 지났다. 본과 4학년이 된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병원실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우연찮게 세미를 길거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커피나 한잔 나누며 이야기를 나누려 근처 커피숍에 들어갔고, 나는 지난 3년 동안 세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기구한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세미는 재수 끝에 수도권 약학대학에 진학하였고, 지금은 그리고 싶었던 만화도 잔뜩 그리며 지낸다고 했다. 더불어 당시 내가 보여줬던 노트가 공부에 재미를 붙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며 고맙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수능을 치루고 대학 합격이 확정된 이후 남는 시간동안 조카 과외 수업을 해주고 있는데, 조카에게도 노트정리의 매력을 전하느라 바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곤 옆에 끼고 있던 자신만의 생물 노트를 내게 보여주며 선생님 것보다 더 멋지죠?라며 자랑하는 모습이 대견했다. 알록달록 잘 정리된 노트는 비록 한눈에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그간에 세미가 얼마나 치열하고 열심히 공부해왔는지 그 열정이 고스란히 노트를 통해서 전해졌다.

 내 주변에서도 흔히 이런 알록달록 노트정리를 하는 친구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대개 화려한 노트정리가 공부의 효율성은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오리고 붙이고 꾸미고 색칠하는 행위가 공부에 흥미를 붙이는 원동력이 되고, 나아가 세미처럼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잘 정리된 노트가 세미에겐 만족감, 성취감, 자신감을 주고, 스스로에게 또 하나의 자극제 역할을 하여 더 높은 곳까지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나 역시 처음엔 스스로 만드는 매력에 이끌려 노트정리를 선택했지만, 지금은 정리 스킬도 늘었고 그 중요성도 절실히 깨달아서 알록달록하지 않더라도 필요하면 간결하게 정리하는 좋은 습관까지 들였으니 세미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노트정리가 구세주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싶다.